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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병] 치료 약도 없었던 캐나다 이민병 이야기 1

이민이야기 그 첫번째

다시 오랜만에 글을 남기는 것 같다. 마지막 학기를 보내며 코로나와 사투하며 학교 졸업도 미루어지고 졸업 전에 취업이 되어 숨 가쁘게 온 것 같다. 오늘은 최근이 이야기가 아닌 이민의 시작의 글을 남겨 보려 한다.

 

2016년 이민병 시작

한국에서 1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해오고 있었고 한 번쯤은 새로운 환경에 직면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때마침 이직을 하게 되었고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며 새로운 업무에 신나게 일하며 지내고 있었던 것 같다. 마음속으로는 '해당 회사에서 해외 발령을 받으면 좋겠다'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런 것도 의미없다는것을 점점 느껴가고 있었다. 

한 번은 어디에서 이런 문구를 접한 적이 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을 바꾸려면 3가지를 바꾸면 된다. 

 첫째, 우리가 사는 곳을 바꾸고

 둘째,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바뀌고

 셋째, 우리의 시간 활용을 바꾼다면 우리의 인생은 바뀐다."

 

출근길에 마주친 쌍 무지개!

필자에게 해당 문구는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강하게 남았다. 맞다. 필자는 당시에 인생을 바꾸고 싶었다. 뭔가 의욕은 있었지만 답답한 현실에 마주한 사항들에 대한 돌파구 필요했었다. 왠지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았고 나중에 낙오자가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을까 하는 아주 미련한 생각들로 머리가 가득했다. 또한, 이런 필자의 상황이 자녀에게 까지 이어지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무엇보다도, 필자의 속내는 돈을 벌고 싶었다. 왠지 답답한 현상황을 파괴할 수 있는 돌파구가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때마침 지방으로 단기 출장, 말이 단기 출장이 이었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방 발령으로 타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필자의 이런 상황은 이민병을 부추기기에 아주 딱이었다. 무엇보다도, 필자와 와이프는 해외에서 만나서 한국으로 들어와 연애를 이어갔고 결혼으로 이어진 케이스였다. 한 번은 와이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필자 왈 '우리는 해외에서 살아보고 장점도 느껴보고 단점도 느껴보았는데 정작 우리 아이에게는 이런 소중한 경험을 직접 할 수 있게 해 주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와이프 왈 '그건 그렇지 그런데 우리가 지금 해외로 나갈 상황은 아니잖아 특히, 나도 하는 일이 있고 이제 막 자리 잡아 가는데 지금 갑자기 나간다는 건...' 필자 왈 '암튼, 조금 오픈해서 생각해보고 조금 알아볼게' 와이프 왈 '그래' 속으로는 그냥 알아봐 뭐 진행될 건 없을 테니까 하는 뉘앙스였다.

 

2018년 

필자는 시간이 무척이나 많았다. 시간 부자였다. 정보를 찾아볼 시간도 많았고 모든 준비사항들이 계획에 맞게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나라를 선택하지는 못했다. 다시 한번 그냥 스치듯이 와이프에게 물어봤다. 필자 왈 '만약 이민을 간다면 우리 현실에 맞는 동남아 쪽이 어떨까?' 와이프 왈 '나는 그래도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가 좋을 것 같은데....' 필자는 생각했다. 오케이 우선 일단락 찾았다. 영어가 모국어로 쓰이는 곳으로 가기로 혼자 마음속으로 정했다.

그리고 여러 나라들을 상상 속에 올려놓았다. 영국, 미국, 캐나다 그리고 호주... 그리고 다시 찾아보았다. 

영국과 호주는 해외 경험이 있어서 조금은 알고 있었다. 영국은 문화도 다양하고 너무 좋은 나라였지만 영주권을 받기에 너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호주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았다. 또한, 취업도 쉽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과 캐나다를 동일선상에 놓고 알아보았다. 광화문에 상담비 12만 원을 주고 상담도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깝기도 하다. 30분도 진행이 안되었는데 말이다. 그 외에도 3곳 정도 상담을 받았다. 현실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암튼, 당시에 미국 트럼프 정권이 이민정책에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이민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럼 나머지 한 곳 솔직히 캐나다는 필자가 대학교 때 유학을 가고자 알아보았던 국가 중에 한 곳이었다. 아마 필자는 그때부터 이미 이민병이 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당시에 캐나다 비자받기가 까다로워서 우회해서 호주로 유학을 선택하였다. 

너무나 좋았던 호주였지만 그때 만약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지금은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가끔 생각도 해본다.

 

다시 이민병 이야기로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박람회도 가보고 이민 담당자와 컨설턴트도 해보았다. 알고 있는 정보라도 다시 물어보고 확인하였다. 그래서 필자에게 아니 우리 와이프에게 가장 적합한 이민 카테고리를 찾아낼 수 있었으며 정말 본격적으로 더욱더 깊이 파고들었다. 필자의 이민병은 더 이상 멈출 수 없는 폭주 기관차 같았다. 그 당시 와이프도 어느 정도 느낌이 있었는지 조금씩 진행과정을 물어보는데 염려가 섞인 말로 물어보기 시작했다. 뭔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보다.... 

 

옥상에서 업무중 보게된 멋진 구름사진

한 번은 상담을 받기 위해 역삼역에 위치한 이민 회사를 찾아갔었다. 

이민 회사 직원 왈 '현재 가지고 계신 자산은 어떻게 되나요?'

필자 왈 '조금 한 전세에 살고 있습니다.'

표정이 바뀌며 직원 왈 '이민을 하기에 금액이 너무 적은데요'

필자는 솔직히 감정을 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서 까지 돈으로 밀려야 하나...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 현실에도 화가 나고 누군가에게 그러한 필자의 상황을 지적받는 것 같아서 그것도 화가 올랐다. 

다시 감정을 추스르며 물어보았다. 필자 왈 '그럼 최선의 방법은 어떤 게 있을까요?'

직원 왈 '현재 2가지 방법을 추천할 수 있습니다. 첫째, 미국으로 이민 시 3천만 원인가 지불하고 미국 지방에 있는 닭공장 가서 일하는 방법, 두 번째는 캐나다 퀘벡으로 가서 프렌치 어학원 (1년이었던 것 같다) 등록하고 프렌치 어학시험 보고 일정 레벨 이상 받은 후 이민을 진행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필자는 상담을 빠르게 마치고 쫓기듯이 나왔다.

 

그 뒤로 상담은 몇 번을 더 받으러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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